네덜란드의 한국 전쟁 참전에 대한 연구 ; A Research on the Involvement of the Netherlands in the Korean War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 국제대학원 국제학과 한국학 전공, 2016. 2. 박태균. ; 본 연구는 네덜란드가 한국 전쟁에 참전한 요인과 2 차 세계대전 이전 외교정책의 중심이었던 중립주의 및 2 차 세계대전 이후 대서양향 외교정책이 한국 전쟁 발발 시에 어떻게 공전했는지 논의한다. 네덜란드의 한국 전쟁 참전에 대한 기존연구는 한국에 파견된 병사들의 경험을 서술한 바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에일란드스가 제시한 네덜란드의 한국전쟁 참전의 네 요인 중심으로 분석했다: ㄱ) 네덜란드가 국제법질서 전통적 지지자였던 요인, ㄴ) 네덜란드가 유럽 지역에 미국의 경제적 원조와 안보 보증이 필요했던 용인, ㄷ) 네덜란드가 다른 NATO 회원국가에게 연대감을 ii 표현하고자 했던 요인, ㄹ) 네덜란드가 아시아 지역에 국익을 보존하려고 하였던 요인이 있었다. 위 요인의 타당성 및 한계점이 네덜란드 외교통상부의 1 차 자료를 통해 확인되었다. 본 연구는 미국에 대한 네덜란드의 의존성이 네덜란드의 한국전쟁 파병의 주요 요인이라는 점을 밝혔다. 미국은 한반도에서의 악화된 군사 정세로 인하여 네덜란드에 구축함 파견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알렸고 이에 압력을 행사... Mehr ...

Verfasser: 닐스
Dokumenttyp: Abschlussarbeit
Erscheinungsdatum: 2016
Verlag/Hrsg.: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Schlagwörter: 한국 전쟁 / 네덜란드 / 참전 / 중립정책 / 대서양정책 / 327
Sprache: Korean
Permalink: https://search.fid-benelux.de/Record/base-27594218
Datenquelle: BASE; Originalkatalog
Powered By: BASE
Link(s) : https://hdl.handle.net/10371/129047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 국제대학원 국제학과 한국학 전공, 2016. 2. 박태균. ; 본 연구는 네덜란드가 한국 전쟁에 참전한 요인과 2 차 세계대전 이전 외교정책의 중심이었던 중립주의 및 2 차 세계대전 이후 대서양향 외교정책이 한국 전쟁 발발 시에 어떻게 공전했는지 논의한다. 네덜란드의 한국 전쟁 참전에 대한 기존연구는 한국에 파견된 병사들의 경험을 서술한 바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에일란드스가 제시한 네덜란드의 한국전쟁 참전의 네 요인 중심으로 분석했다: ㄱ) 네덜란드가 국제법질서 전통적 지지자였던 요인, ㄴ) 네덜란드가 유럽 지역에 미국의 경제적 원조와 안보 보증이 필요했던 용인, ㄷ) 네덜란드가 다른 NATO 회원국가에게 연대감을 ii 표현하고자 했던 요인, ㄹ) 네덜란드가 아시아 지역에 국익을 보존하려고 하였던 요인이 있었다. 위 요인의 타당성 및 한계점이 네덜란드 외교통상부의 1 차 자료를 통해 확인되었다. 본 연구는 미국에 대한 네덜란드의 의존성이 네덜란드의 한국전쟁 파병의 주요 요인이라는 점을 밝혔다. 미국은 한반도에서의 악화된 군사 정세로 인하여 네덜란드에 구축함 파견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알렸고 이에 압력을 행사했다. 따라서 네덜란드 정부는 손익분석을 바탕으로 결정을 냈다. 그 결과는 경제적 재활 미국의 지원과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안보 보증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네덜란드가 미국 압력에 굴할 수밖에 없었다는 판단이였다. 이 측면에서 네덜란드가 뉴기니를 보존하고자 하는 의도는 네덜란드 정부 고려의 구체적인 요인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결국에는 네덜란드는 한반도에 파병할 결정으로 인해 공산권을 향한 회유정책을 포기하게 되었다. 대서양향 접근과 중립주의 접근이 당시 네덜란드 외교정책에 공존하는 것은 이 점과 큰 연관이 있다. 기존연구는 이 사실을 지금까지 간과했다. 네덜란드는 냉전 시작으로 현성된 양극 세계질서의 구조(framework) 내에 중립주의의 전통을 유지하려 했다. 국제법질서의 보호자로써 현실주의적 정치에 자유주의 접근을 순진하게 시행하고 싶었다. 미국 외교정책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유지하였는데 대서양향 구조에서 정책을 취해야 했다. 위에서 설명한 국익을 보존하기 위해 미국의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연루 (entrapment)에 대한 네덜란드 정부의 우려가 진실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iii 더욱이 중국 문제에 대한 네덜란드 외교정책과 미국 외교정책 간의 논쟁점은 흥미로운 사실을 드러냈다. 유엔군이 38 도선을 건너간 것은 대체로 중국이 한국 전쟁에 개입한 이유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본 연구는 유엔군이 38 도선을 넘어 간 사실보다 다른 여러 요인에 대한 우려가 최후의 축진제였다고 주장 할 수 있는 것을 나타냈다. 대만 해협으로 7 함대의 파견은 최근에 건국된 불안정한 국가의 생존을 도전하는 도발에 확고히 반응하는 중국에게도 큰 위협이었다. 중국 문제에 대해 급진 야망을 가진 맥아더는 유엔군과 미국 극동군의사령이 되어 중국의 우려를 심화시켰다. 이해의 충돌(conflict of interest)이 없는 유엔군 사령부가 있고 7 함대가 대만 해협에 없었으며 북한 침략을 막는 의도를 분명히 밝혔다면 38 도선을 건너가는 것이 가능했을 수도 있다. 필자는 본 연구가 중국 개입에 대한 점을 드러낸 것처럼 무력 정치의 냉전시기에 소약국 정책에 대한 연구가 흥미로운 점을 나타낼 수 있다는 제시로 본 연구를 끝내고자 한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말해서 , 한국 전쟁 때 소약국 정치에 대한 연구는 주로 강대국의 참전에 집중하는 기존연구의 흥미로운 보탬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연구는 사람들이 잊혀진 전쟁을 기억하게 해 줄 수 있다. ; This paper has answered the questions why the Netherlands participated in the Korean War and how the seemingly contradictory approach of colonial neutrality and the Atlantic approach coexisted in Dutch foreign policy at the ...